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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홍콩통신 (3)

아시아의 상처, 불굴의 역사와 미래

 신학에 이어 진행된 YMCA 사명(Mission)과 역사는 서광선 박사님께서 진행하셨습니다. 세계YMCA는 1998년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도전 21(Challenge 21)을 제정하게 됩니다. 도전 21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4년간 논의하여 결정되는데 YMCA 파리기준(Paris Basis, 1855년 제정)에 담겨있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는 표현을 다시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지도자들에 맞서 아시아,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를 자칫 영토 확장으로 생각하는 식민지 역사와 얽혀있다. 실제로 너희가 그런 식으로 식민주의에 봉사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표현대신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사랑과 정의, 평화와 화해, 모든 생명이 충만한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위해 YMCA는 활동한다고 선포했다는 내용은 마치 구체적인 논쟁을 옆에서 보는 듯 하고, 힘 있는 서양 지도자들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도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들게 했습니다. 또 Men으로만 쓰여 있던 파리 기준에 비해 도전 21에는 Y 운동주체로 Women and Men, 즉 여성이 먼저 들어가게 됩니다.

 서광선 박사님은 참가자들이 YMCA 사명과 지역Y 활동을 연계해서 발표하도록 하시면서 발표 순서를 영국 식민지, 스페인 식민지 이런 식으로 묶어서 진행합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아시아 각국에 식민지 상처(일제 36년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얼마나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수백 년의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가 얼마나 깊이 남아있는지 생생히 드러나게 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카리나가 빈곤 청소년을 육성하기 위한 청소년의회 활동을 설명하면 서광선 박사님께서 그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대해 부연하십니다. 아르헨티나는 1962년 군부독재가 국가를 장악하고, 거기에 맞서 오랜 기간 강력한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YMCA 지도자들도 많이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오랜 기간의 민주화투쟁을 거쳐 민주화된 아르헨티나는 90년대 말부터 금융자유화를 단행해 다국적 금융자본들이 금융시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2001년 갑자기 국가가 부도 사태에 빠져 인구의 50%가 빈곤선(poverty line)에 빠졌는데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YMCA는 국가의 미래인 빈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많이 전개하고 있습니다.

 서광선 박사님이 자료로 나누어준 스티글리츠 박사(이 분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위원회 위원장을 했고, 세계은행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비인간적인 세계화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지적하는 양심적인 학자입니다)가 쓴 글에는 아르헨티나가 워싱턴 컨센서스(정부를 최소화하고, 규제를 줄이는)라고 불리는 IMF의 잘못된 정책의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글에 따르면 199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멕시코가 금융시장을 개방해 외국은행들이 국내은행을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소규모 국내기업에는 돈을 빌려주지 않고, 주로 다국적기업(코카콜라,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상대하면서 지역기업은 위기상황에서 대다수가 문을 닫고 말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현재도 미국과 유럽의 결탁에 의해 세계화를 좌지우지하는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에서 선정하고, IMF 총재는 유럽에서 선정한다고 합니다. 서광선 박사님은 굉장히 점잖으신 분인데 미국 얘기만 나오면 그 독단적이고, 자기이익적인 정책추구에 흥분하시면서 목소리가 커지십니다.
 
 미얀마에서 온 난방의 발표가 끝난 후 미얀마의 군부독재와 정치상황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자신의 마을은 수도에서 많이 떨어져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하면서도 이사 중에 2명이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 하는 것이 두렵다(Afraid)고 합니다. 난방은 제 옆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제가 이사 2명이 아직도 감옥에 있냐고 물으니까 저에게 “from 1991, one passed away, one present (He is also a lawyer) go to jail and exit & go & exit 라고 쓴 메모(난방은 영어소통이 어려워 중요한 말은 적으면서 하는데 이사 두 명이 다 변호사인데 한명은 감옥에서 죽고, 한명은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를 전해주는데 그것을 보자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옵니다. 난방이 사는 곳은 수도인 양곤에서 기차로 무려 3일을 가야하는 미얀마 북부의 중국국경 지대입니다. 그런데 그 시골마을 조차 이런 야만적인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난방이 일하는 미치나(Myitkyina) YMCA는 카친(Kachin)주의 수도인데 미얀마 북부,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카친 지역은 울창한 밀림과 환경다양성이 높은 지역으로 동남아시아 산림의 50%가 이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벌목이 심각하게 자행되고, 그 결과 산림파괴, 수자원 고갈과 생물다양성의 파괴의 악순환으로 지역주민들의 삶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미치나Y가 지역주민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불법벌목이 줄어들지 않는 것은 불법 벌목되는 목재가 최고급가구로 쓰이는 티크나무이고, 불법벌목 기업과 세관, 경찰, 군부가 뇌물구조로 얽혀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수많은 불법벌목 트럭이 당당히 줄을 서서 국경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이 불법 벌목에 연관된 가장 큰 기업이 중국기업이고, 그 다음이 한국기업이라고 합니다. 미얀마는 무려 50여 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의 강압에 온 국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 받고, 억압받는 미얀마 국민을 위로하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돈만을 목적으로 불법벌목에 앞장서면서 지역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한국기업의 파렴치에 분노와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습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코비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에이즈(AIDS)예방활동을 발표한 후 서광선 박사님께서 아프리카에서는 교회보다 YMCA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높다면서 소말리아 사태가 났을 때 국제기구를 따라 교회 목사와 신부들은 다 피난을 갔지만 YMCA는 위험을 무릅쓰고 난민을 도와주며 반군들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 과정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감동으로 지켜봤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영국 식민지를 경험했는데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에서 만들어진 YMCA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인식될까 하는 일말의 의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몇 년 전 뉴델리Y(뉴델리Y는 서울Y보다도 규모가 큽니다.) 사무총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굉장히 권위적이고, 경영에만 관심이 있어서 저의 이런 편견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도는 국민의 2%만이 기독교인이고, 아직 종교 갈등이 심하기 때문에 소수인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큽니다. 실제로 작년 12월 칸다마(Kandhama)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공격을 당해 6명이 죽고, 집 500채, 교회 50여개가 파손되었고, 지금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데 극단적인 힌두교도들이 저지른 행위에 정부와 경찰이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고,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연방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도 주별로 격차가 크다고 합니다. 남쪽 지역은 지방정부에서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상황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고, 뉴델리 등 북쪽은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서광선 박사님이 70년대에 겪은 한 일화를 얘기하시는데 집도 없이 굴을 파고 사는 지역에서 시민단체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글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숫자를 배워 버스를 자유롭게 타고 다니게 된 여성들이 가장 먼저 간 곳이 주 정부에 가서 자신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당시 서광선 박사님은 군사정권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 있던 상태인데) “자기는 자유가 없지만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살고 있고, 당신은 먹을 것도 없고, 집도 없지만 정부에 시위할 자유는 가지고 있는데 당신이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더랍니다. “그래도 한번 얘기해 달라”고 하니까 한 10분간 자기들끼리 열심히 토론하더니 “그렇다면 자기들은 자유(freedom)을 선택하겠다.”고 했답니다.

 물론 지구촌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가 YMCA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예루살렘에는 미국의 원조로 최신시설로 지어놓은 이스라엘Y와 허름한 팔레스타인Y가 있는데 서광선 박사님 일행이 팔레스타인Y를 방문하면 이스라엘 정부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 Y는 방문하지 않고 여기를 방문하냐고 압력을 넣기도 하고, 중국Y는 세계Y연맹, 아시아Y연맹에 아직 참가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를 물으니 중국Y 간사가 “중국은 하나인데 대만Y가 가입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어떻게 또 가입하냐?”고 정색으로 얘기합니다. 그럼 일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지는데 (사실 우리도 남북이 같이 있으면 그런 예민한 문제가 생기겠죠) Y조차도 중국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최근 2년간 비공식적인 관계는 활발히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홍콩에는 홍콩Y와 홍콩 차이나Y 두 곳이 있고, 홍콩Y는 서양인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콩Y 견학을 갔다 인터내셔널 유치원을 방문했는데 학생 교사 모두 서양인, 인도인, 중국인 등이 섞여 있고, 프로그램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원장에게 어디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Original England 라고 합니다. 세계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인 아편전쟁(1840년)에서 승리한 영국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무려 150여년 홍콩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국인이 아직도 홍콩에 살면서 콧대 높게 얘기하는 것이 어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은 중국의 광저우(廣州) Y를 방문하면서 였습니다. 11월 21일(금)부터 23일(일)까지 제3차 한중일 평화포럼이 중국 광저우에서 개최되었는데 광저우는 홍콩에서 열차로 2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연맹의 권유에 따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로 이루어지는 철저한 통제사회이기 때문에 중국Y 역시 제대로 된 Y활동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포럼에서 기조발제를 한 상하이대 구준 교수는 국가는 국가의 이익만을 대표하기 때문에 국가이익을 초월해 인류이익을 위해서 활동하는 민간단체의 시야가 더 넓고,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토론에 참여한 우한Y 사무총장은 빈부격차, 청소년범죄, 가정폭력, 아동분유사건 등 중국의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과거 중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발언이었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광저우 시는 중국 4대 왕조의 수도였던 2,225년 된 도시입니다. 중국에서 국제적인 교류를 처음 시작한 곳이고, 홍콩과 접하고 있어서 경제는 발전되었지만 공기는 상당히 안 좋습니다. 광저우Y는 1909년 창립하여 내년 100주년을 맞는다고 하는데 토요일 저녁 교회에서 개최된  광저우Y 회원 행사는 1000여명이 강당을 가득 채우고 노래, 무술, 무용, 마술 등 각종 클럽의 발표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면서 마치 한국Y의 초기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행사 말미에 “We are belong to the Y”를 Y회원들과 한중일 참가자가 모두가 율동과 함께 부르는 데 부천Y 회원들과 같이 있는 듯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부통제가 워낙 강한 중국사회에서 중국Y 역시 정부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 평화포럼에도 저녁 만찬마다 광저우시 종교국 국장이 직접 참석하고, 중국Y 연맹 사무총장은 상무위원회 고위직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사회 자체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중국Y가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중국Y는 문화혁명 전에는 30개 이상이었는데 현재는 10개라고 합니다. “왜 그렇냐”고 하니까 정부에서 허락을 잘 안 해준다고 합니다. 또 시안Y 총무는 문화혁명 당시 심각하게 핍박을 받았고, 부인은 손톱이 다 빠졌다고 합니다. 제가 표피적으로 알던 중국Y의 이면에는 이런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얼빠진 사회지도층 인사가 “영어를 못하면서 잘 사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해서 사회적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 눈에는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은 안 보이고, 미국과 유럽만 보일 정도로 편견의 눈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얼마나 국익만을 추구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잔인하게 수탈했는지 하는 역사적 의식이 없으며 그런 어이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가나는 세계적인 금 생산지로 유명한데 금광에서 바로 제네바로 실려 가기 때문에 가나 사람들은 구경도 못한다고 합니다. 최근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미국과 유럽의 정책은 10년 전 IMF가 우리나라에 강요했던 정책과 정반대입니다. 이런 이중성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합리화됩니까?) 

 국가별로 특이한 것이 식민지 경험과 영어사용입니다. 인도와 필리핀은 국가독립 후에도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입니다. 간디가 가장 개탄한 것 중 하나가 영어공용어였습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간의 격차(Gap)가 더 커지고, 심지어 집에서도 아이들과 노인 간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더 나아가 모국어보다 영어를 월등하게 생각하면 식민지근성이 몸에 붙고, 모국어로만 담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철학적 내용과 예민한 감정 표현이 서툴게 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반면에 스리랑카는 오랜 식민지 경험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어를 사용합니다. 홍콩 역시 오랜 식민지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제학교와 일반학교가 나누어져있어 일반학교에서는 중국어로 수업을 합니다. 일요일에 홍콩 시내에 나가면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은 수많은 필리핀 가정부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필리핀은 빈부격차가 큰 나라이고, 국가의 경제위기로 Y활동도 대단한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가 되니까 수많은 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로 나가 있는데 홍콩에서도 고학력 필리핀 여성들이 가정부와 함께 아이들 영어교사를 겸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도 영어를 못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기초는 단단합니다. 이번에도 한중일 평화포럼에서 놀란 것이 일본 분들이 언제나 한국 참가자보다 버스에 먼저 타는데 앞 좌석은 비워놓고 항상 뒷 자석부터 앉아서 기다립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지 않았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고, 또 항상 검소하고, 온화합니다.

 이번에 다시 확인 한 것이 언어는 듣기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일단 듣기가 되어야 뭔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듣기를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물론 듣기를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돈이  안 되니까 영어학원에서 이렇게 가르칠 리는 없지요.) 또 저는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하고 봅니다. 그럼 아 또 정확한 단어가 아니구나, Broken English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누구든 영어능력 보다는 내용과 경험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영국식 영어가 기본이기 때문에 제가 일본Y 연맹 사무총장님하고 무슨 말을 하다가 “포리(40)”라고 했더니 “뭐요(Pardon) 하더군요. 그래서 “포 제로”그렇게 말하니까 “오 포티(40)”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서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국식 영어가 맞다. 미국식 영어가 맞다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도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를 가르친다고 아이들 혀 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10여개 국가, 13명의 YMCA간사들이, 5주간을 함께 한 독특한 경험은 저에게 많은 자극과 감동, 새로운 시야를 갖게 했습니다. 역사와 현재, 통시(通時)적인 시각으로 아시아의 아픔과 상처를 읽고, 느끼면서 함께 아파하기도 하고, 상처 속에서 쓰여 진 희망의 역사를 읽으면서 함께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던 것은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낮은 곳에서 상처받은 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강한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