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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밥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밥상혁명
강양구. 강이현 지음, 살림터

장면 1.
몇주 전 고속버스를 탔는데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아토피가 심한 여자아이(초등 3~4학년?)가 앞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알록달록한 과자 두 봉지와 청량음료를 손에 들고 먹기 시작한다.
옆 좌석에 앉아있는 아빠, 엄마 역시 손에 과자를 들고 있다.

(과자가 아토피에 얼마나 안좋은지) “말할까? 말까?” 참, 고민이다.

장면 2.
최근 생협들이 경쟁적으로 매장을 내면서 부천Y 등대생협 회원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단지에도 다른 생협 매장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생협....소위 미끼상품이라고 하는 폭탄 세일을 매일한다. 
그래서 부천Y 회원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생협은 농촌살리기 운동을 하는 곳이고, 농민들에게 적정가격을 보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폭탄세일....“싸면 무조건 좋은 것인가?”  

당신의 밥상은 안녕한가?
이 책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충격적인 사실을 만나게 된다.

“영국에서는 어린이 비만이 12년 새에 7퍼센트 늘어 2~10세 어린이의 약 17퍼센트가 비만으로 분류된다.”          (본문 중에서)

(영국 요크대학 스톡홀름 환경연구소에서 영국식탁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쇠고기는 2만 1,426킬로미터를 이동한 오스트레일리아산, 감자는 2,477킬로미터를 이동해 온 이탈리아산, 당근은 9,620킬로미터를 이동해 온 남아프리카공화국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상추가 8,772킬로미터를 이동해 런던으로 보내진다면 그 상추는 자신이 에너지로 제공하는 것보다 127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본문 중에서)

“1910년에는 소비자가 먹을거리에 1달러를 지출하면 40퍼센트농민이 가져갔다. 그러나 1997년에는 이 몫이 고작 7센트줄어들었다....지금 미국에서 1달러로 빵 한 조각을 사면 밀 재배 농민에게는 고작 6~7센트가 돌아간다.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비료, 유통, 가공, 판매를 장악하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몫으로 돌아간다.”    (본문 중에서)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1 이상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소들이 먹는다....쇠고기 1kg을 생산하는데는 곡물 11kg이 들어가고, 돼지고기 1kg을 생산하는데는 곡물 7kg, 닭고기 1kg을 생산하는데는 곡물 4kg이 들어간다.”  (본문 중에서)

도대체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프레시안 기자인 저자는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원인과 함께 세계화의 최대 희생자인 농민들의 삶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세계 각지의 농민들을 만나면 어디서나 처음 듣게 되는 단어,
이경해

2003년 9월 10일, 멕시코 칸툰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 항거하며 목숨을 끊은 농민 이경해 씨.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세계 곳곳의 농민들은 그를 생생히 기억하며 파괴되고 있는 땅과 물, 사라져가는 토종종자, 농촌에서 쫓겨나는 농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영웅적인 운동가로 이경해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의 언론들은 이경해 씨의 죽음을 사건기사 정도로 가볍게 다루었지만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의 고향을 찾았고, 영국 가디언도 르포 기사를 통해 한국 농촌의 비참한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농민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를 기리고 있다.

왜 일까?
돈만을 목적으로 잔인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대척점에 농민들이 서있기 때문이다.
먹거리 마저 대량화, 대기업화되어 누가, 언제, 어떻게 생산했는지 조차 모르는 현실의 정면에 그와 맞서싸우는 농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 먹거리(Local Food)가 건강, 토지, 환경을 살린다.

그렇게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 후....저자는 두가지 열쇳말을 제시한다.
로컬 푸드(Local Food) 식량주권(Food Sovereignty)
이 책에는 이 두 열쇠말을 따라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먹거리 혁명의 사례들이 풍부히 들어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근거리에서 생산하는 농민들과 도시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농민장터(farmer's market)가 열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서는 1992년부터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에 농민장터가 열린다. 토요일 하루에만 1만 5,000명이 다녀가는 농민장터는 이제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캘리포니아 지역 약 200마일(300킬로미터) 이내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만 판매된다.”       (본문 중에서)

캐나다 벤쿠버에는 도시 텃밭을 만드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 먹거리를 직접 생산하기 위해 “2010년까지 벤쿠버 시내에 2,010개의 텃밭을 만들자는 2010 공공텃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운동으로 정원, 뒤뜰, 옥상 발코니가 텃밭으로 변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뒤뜰 나누기(Sharing Backyard), 한 줄 나누기(Grow a Row, Share a Row) 등 자신의 텃밭에서 기른 먹거리를 저소득층에 기부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벤쿠버 시민들은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경작하면서 또 건강하게 생산된 먹거리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일본 콩 지키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콩 자급률은 4퍼센트 수준(2003년 기준), 사료용을 제외한 콩 자급률도 22퍼센트로 식탁에 오르는 콩의 4분의 3 이상이 외국산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미국산 콩의 90퍼센트 정도가 유전자 조작(GM) 콩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사정도 다르지않다.)

일본의 소비자와 농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년 10평의 땅으로 일본 콩을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구좌(약 4천엔)를 신청한 시민은 약 10평의 밭에서 난 일본 콩 약 4~5킬로그램을 공급받는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풍년인 해에는 평년보다 더 많은 콩을 받고, 흉년인 해에는 더 적은 양의 콩을 받는다. 콩 작황 여부에 상관없이 농민이 콩 농사를 지속적으로 짓도록 하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량화, 산업화된 세계적인 농산물체계에 맞서 지역 먹거리(Local Food)가 농민과 소비자를 연대시키고, 환경과 건강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로 되고 있는 것이다.

식량안보가 아니고. 식량주권이예요.

세계화에 맞선 농민들은 하나같이 식량주권을 강조한다. 두 용어의 차이가 뭐 그리 크다고, 그렇게 예민할까?

“식량 안보는 식량 확보만 강조한다. 국민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단으로 식량 수입, 재고 관리 등을 최선의 방법으로 여긴다. 여기에는 식량을 자급하자 이런 생각은 빠져있다.”
“식량주권의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내가 발 딛고 선 땅에서 직접 먹을거리를 생산하자. 내가 먹는 먹을거리의 질을 스스로 통제하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해법 역시 단순하다. 바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이 책에는 2008년 식량 위기 때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캐나다 등 주요 수출국이 했던 행위가 상세히 나와있다. 식량위기에 처하자 식량 수출국들은 결국 자국의 식량부터 먼저 챙겼다. 심지어 일부 국가는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들이 또 하나 문제삼는 것은 ‘식량안보’라는 생각이 결국 농업을 대형화, 산업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치장된 대량 생산의 이면에는 엄청난 화석연료가 필요하고, 닭과 돼지를 대형화, 산업화하면서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밥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과거 사회주의 혁명이론에서 소농은 쁘띠 부르주아지라며 아주 우습게 취급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전한 오늘, 우리는 직접 행동의 선두에 서있는 소농들을 만나게 된다.

맥도날드 반대, 세계화 반대로 유명한 프랑스 농민 조제 보베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에 사는 소농이 자기 땅에서 사탕수수, 커피, 코코아가 아니라 자기 먹을거리를  재배한다면 그들이 왜 굶주리겠는가?” 

맞다. 각자가 스스로의 먹거리를 해결하려는 주체적인 노력, 도시 인근의 토지를 보호하고, 근거리 농민과 연대하는 것.
농민과 시민들의 강고한 연대에 의해 우리의 땅, 물, 종자, 농산물,
우리의 환경과 건강을 지켜갈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