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김예슬을 위해
추락을 경험하지 못한 자, 비상을 알지 못하니
일상에 바쁜 나는 김예슬 님의 글을 뒤늦게 만났다. 인터넷 공간에서 <대학을 거부한 고대생>이라는 문구를 만나고 여러가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정작 그녀의 글을 직접 읽은 것은 며칠 안된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누군지도, 그녀의 삶이 어떤지도 모르지만 그 글에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아픔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리고 <창비논평>을 통해 소설가 김사과 님의 글을 읽었다.
그 글의 진지함과 솔직함에 마음이 끌리지만 몇가지 문구는 나에게 걸린다.
첫 번째는 탈학교 아이들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안학교는 중산층 부모의 값비싼 옵션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타인의 삶이 놓인 중요한 문제를 누구와 논쟁할 생각은 없다. 다만 김예슬 님과 김사과 님의 글을 매개로 내 생각을 나누고 싶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버리는 것
탈학교 아이들 다수가 대학으로 돌아갔으니 탈학교 운동이 실패했다는 말은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것을 너무 가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삶의 자유로움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나는 실패나 성공을 떠나 그 근저에 놓여있는 우리의 존재방식과 대면하고 싶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정한 삶의 순간, 배움과 선택의 순간, 정말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세상과 온몸으로 대면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는 인생에 그렇게 임하고 있는가?
아니 그렇게 임한 순간이 있기나 한가?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런 순간에 작동하는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류대학, 경제적 안정성, 사회적 지위....그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다 중요한 일이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좋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한다면 그 사회적 영향력은 그만큼 크다.
하지만 정말 그것을 다 선택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선택을 회피하도록 하는 그런 것은 아닐까?
우리 인생은 짧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저런 좋은 것을 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사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 순간은, 바로 무언가를 버린 순간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순간, 내일을 위해 오늘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버리며 산다. 사랑, 우애, 지지, 격려, 오늘을 즐기며 사는 것, 이웃과 따뜻하게 나누며 사는 것......내일을 위해 우리가 버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것을 버리면 안될까?
김예슬 님이 언젠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적극적인 선택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실패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당하게,
인생을 건 선택, 모험에 가득한 선택, 앞을 모르는 선택.
나는 사회에서 정해진, 사회에서 강요하는 길을 벗어나 어떤 선택을 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김예슬 님과 함께 울고, 웃고 싶다.
주류문화를 벗어난 불안과 흔들림, 그 너머에 있는 것
우리 아이들(중 2, 초등 6)은 대안학교인 ‘볍씨학교’에 다닌다. (나는 가까운 곳에 대안학교가 생기지 않았다면 대안학교를 찾아 일부러 먼 곳까지 아이들을 보내기 보다는 일반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볍씨학교 학부모들은 정말 다 평범한 사람들이다.(중산층이라기보다는 서민들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경쟁중심, 학습중심의 일반학교가 싫어서 대안학교를 선택했지만 항상 불안하고, 흔들린다.
주류문화에서 벗어난다는 것,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 이번 호에는 대안학교 출신 청소년 여러 명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의 흔들림, 그 글의 방황....그 아이들은 다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소위 일류대 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도 있고,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아이도 있다. 무엇이 옳고 틀리겠는가? 그 불안감 속에서 자기인생을 살아가는 힘, 그 진지한 고뇌가 가장 풍요로운 인생의 자양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뇌의 힘을 잃어버렸다.
스펙에만 매달리고, 박스 안에서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그래서 다 허기지고, 거칠다.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그래서 느끼는 충만함을 상실하면, 권력욕과 물욕으로 그 허기짐을 채우려한다.
소위 일류대를 나오고, 높은 자리에 있지만 증오심으로 가득한 사람들,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좌파 때문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럴까?
오직 밟고, 밟히는 서열적 경쟁만이 그들의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도 불쌍하다. 가진 것은 많지만 영혼이 불쌍한 사람들이다.
영혼은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 스스로가 진실로 답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점차 메말라간다.
오래전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그들의 침실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전쟁 대신 사랑을”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잘나고 못나고,
성적에 따라 일렬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의 눈빛이다.
김예슬 님은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고대 경영학과 다니던 잘난 사람이니까 일으키는 파문이라고 냉소하지 말자.
대안학교 다니는 청소년들의 흔들림에도 좋은 부모 만나서 살만하니까 하는 치기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자.
누구도 답을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에 함께 아파하자.
그래서 그들이 사람을 짓밟고 사는, 이 치졸한 세상 너머에서
용기있고 당당하게,
가난해도 떳떳하게,
서로 서로 손을 맞잡고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추락을 경험하지 못한 자 비상을 알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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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daihage 2010/03/26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뉴스를 통해 김예슬양의 용기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자보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20년전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많은 대학생들이 하던 고민, 바로 그것이었으며 더 나아질 것도 없이 더 막막한 현실만 남아있는 대학의 모습이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죽어라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내가 왜 이곳에와 있는지, 무엇을 위해 공부해왔는지를 고민하는 많은 대학생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끊이지 않는 경쟁의 테두리안에서 사람다운 모습들을 잃어가는 이땅의 학생들이 대체 이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 지도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김예슬양처럼 자신에게 부딪친 이런 고민들을 세상에 꺼내놓고 현실이 바라는 길이 아닌 자신이 바라는 길로 인생의 키를 전환한 용기있는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다른 목소리 2010/03/27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김예슬 양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젊은 시절, 낭떠러지 끝에 서있던 느낌들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더 관심갖는 것은 '그 선택의 순간''선택의 힘'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형성될까요? 김예슬 양 같은 극적인 선택은 아니더라도 사실 우리들 모두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살지요. 그럴 때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실 진정성과 자기다움 보다는 주어진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요. 조금 이라도 다른 선택을 하려면 불안해지지요. 그래서 자기답기 보다는 진정한 삶과 직면하기 보다는 그냥 모나지 않게 주어진 길을 (어쩔 수 없이) 걸어가지요. 그것이 삶일까? 아니면 어떻게 할까?